만락정(晩樂亭) 조선시대 대학자 우암 송시열 선생의 제자로서 가장 총애를 받았던 선천 조유원(仙川 趙維元 1636~1708) 선생의 체취가 서려있는 정자이다.
하늘 개이고 공기는 맑아 경면(鏡面)이 평온한데
봄바람이 화창하게 어디서 생기는가?
처음으로 수국을 가니 조금 찬 기운이 일고
잠깐에 파심(波心)을 지나 온갖 채색이 만들어지네
가만히 연하(烟霞)를 쫓아 살살 불고
곱게 불어와서 버들을 가벼이 스치네
도연(陶然)히 북창(北窓)에 희황(羲皇)의 나그네가
높이 누워 어찌 만고(萬古)의 정을 감당하리.
<순천시 황전면 선변리 만락정(晩樂亭) 8경(景) 중>
정자가 있는 선변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어사방천(御使防川)이란 넓은 호수를 만날 수 있다. 이 ‘어사방천’은 만락정의 주인 선천 조유원 선생이 당시 어떠한 인물이었는지를 짐작케 해주는 유래를 지니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 조정의 부패에 환멸을 느낀 선천 선생은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내려와 움막을 짓고 은둔생활을 했다. 이때 암행어사에 급제한 선천 선생의 친구가 찾아와 다시 벼슬을 할 것을 권유했으나 완강히 거절, 어사는 이에 탄복해 돌아가면서 ‘마을 앞에 흐르는 물을 막으면 훌륭한 인물이 나오겠다’는 말을 남겼다. 선천 선생은 이 사실을 순천부사에게 전해 이곳에 제방을 쌓게 했다. 그 후부터 이 지역 사람들은 이 천을 ‘어사방천’ 이라 부르고 있다.
어사방천과 더불어 음양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 만락정, 이 정자는 1697년(숙종 23) 선천 선생에 의해 단층 맞배 지붕 골기와 건물로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좌우 재실형 구조로 건립됐다.
정자의 주인인 선천 선생은 우암 송시열 선생의 제자로서, 오늘날 순천의 정신문화를 잉태시킨 선비다. 선천과 우암과 깊은 사제지정을 말해주기라도 하듯 만락정 처마엔 ‘오도부창주(吾道付滄洲)’란 우암 선생의 친필 현판이 걸려 있어 길손의 눈길을 잡는다.
또 정면의 다섯 기둥에는 선변일월(仙邊日月), 일수청사(一水淸瀉), 양안교취(兩岸交翠), 운귀석동(雲歸石洞), 학립송하(鶴立松柯)라고 양각된 심석 송병순 선생의 주서(柱書)가 걸려있다.
선천 성생의 만락정은 황전면 일대에서 건립 시기가 가장 오래된 정자로서, 당시 지역 선비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했으며 훗날 지역 인재들의 강학소로 활용돼 순천지역 정신문화의 발원이 되기도 했다.
특히 이 정자와 관련된 시문들은 ‘승주읍지’와 ‘전남도지’ 등 각종 향토 자료집에 잘 드러나 있다. ‘순천 옛시’편을 살펴보면 ‘만락정 8경’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만락정 8경’ 가운데 한 수다.
푸르게 뻗쳐 높고 높이 돌로 벽을 만들고
천년의 맑은 기운 누굴 위하여 맑은가?
아홉 겹으로 병풍을 만들어 하늘 가운데 걸어놓고
삼층으로 옥을 깎아 구름밖에 걸쳤는데
아침이면 적성(敵城)에 북새가 왜 일어나는가?
저녁이면 향악(香岳)에 왜 붉은 노을이 생기는가?
산과 더불어 평소에 한가한 사람이 있어
숲과 구렁의 풍류는 만고(萬古)의 인정(人情)이라.
<‘대악(垈岳)의 높은 바위’ 전문>
선천 조유원 선생이 세상을 떠난지도 어느덧 300여 년이 지났다.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시끄럽기만 한 것을, 단 한가지 변함없는 건 선변 마을 겨드랑에서 흘러내리는 어사방천 뿐….
오늘도 어사방천은 오염에 절여진 세상을 씻어내듯 끊임없이 세상 밑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고추잠자리가 호수 면에 내려앉은 정자 그림자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고 하늘로 치솟는다. 낚시처럼 휘어진 고추잠자리 꼬리에서 문득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진다.